[두니아 너머] 퀴어 운동은 서양이 원조 아닌가요?
글 조고은(번역가, 번역행정사)
이성애 여성과 퀴어 여성의 페미니즘, 서구 여성과 아시아 여성의 페미니즘
1995년 베이징에서 열린 제4차 UN 세계여성대회에서는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첫째는 1975년부터 개최된 UN 세계여성대회 역사상 최초로 레즈비언 단체가 독자적으로 공식 부스를 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부스를 제안한 사람은 태국의 레즈비언 단체 설립자이자 아시안 레즈비언 네트워크의 발기인인 안자나 수바르나난다였다. 당시 세계여성대회는 ‘성적 지향’의 다양성이나 동성애 인권의 문제를 여성 안건으로 수용하지 않고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동성애를 범죄로 규정하는 중국 정부가 세계여성대회의 레즈비언 행사를 탄압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때 활약한 것이 중국의 레즈비언 단체와 게이 운동가, 심지어 정부 직원이나 자원봉사자로 참가한 중국 여성들이었다. 동성애를 탄압하는 중국 정부에 맞서 그들은 대회 기간 내내 레즈비언 부스를 지키며 다양한 행사를 개최하고 게릴라 행사를 기획하여 기습적으로 진행하기도 했다.
두 번째는 인도 페미니스트인 찬드라 탈파드 모한티를 비롯한 여러 아시아 페미니스트들이 서구 여성의 경험을 기준으로 자신들의 페미니즘을 아시아 여성에게 전파하고 계몽하려는 서구 페미니스트들을 본격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아시아 페미니스트들은 자신들의 비판의식을 담아 ‘반 제국주의’ 항목을 대회의 최종 선언문에 더하고자 했으나 ‘제국주의’ 개념에 대한 견해 차이로 결국 무산되고 만다. 이 대회를 계기로 아시아 페미니즘은 더욱 왕성하고 폭넓게 자신의 활동을 펼쳐나갔고, 서구 페미니즘 역사에서도 1980~1990년대를 퀴어 페미니즘과 제3세계 페미니즘이 번성한 ‘페미니즘의 다양화’ 시기로 명명하곤 했다.
여성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여성운동이 있듯이 퀴어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퀴어 운동이 있다. 서구의 퀴어 운동은 서구 근대 사회가 만든 성별 구분 제도(남녀 이분법)와 가족제도(이성애 핵가족)에 따른 억압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한다. 서구 근대 사회는 일단 인간의 신체를 남자와 여자로 나눈 뒤, 각각이 가져야 할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이라는 역할을 설정했다. 그리하여 남자나 여자에 부합하지 않는 신체는 물리적으로 교정하여 둘 중 하나로 만들거나 아예 비정상적인 신체로 소외시켰고,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의 역할에 부합하지 않는 행동은 법, 제도, 윤리, 정서적 처벌을 통해 교정하거나 위험하고 문란한 존재로 소외시켰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지극히 당연한 자연의 섭리이자 인간의 본성인 것처럼 포장했다.
그러나 서구 근대의 남녀 이분법과 이성애 핵가족이 보편적인 자연의 섭리가 아니듯 아시아 국가들의 성별 구분과 가족제도는 양상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서구 제도에 저항하는 것이 퀴어 운동이라면 아시아에 ‘그 퀴어 운동’은 없을 수밖에 없다. 아시아의 성별 규범이나 가족 제도에 저항하는 또 다른 성소수자 운동이 있을 뿐이다.
인도네시아의 다양한 젠더 체계
여러 민족이 모여 하나의 공화국을 이룬 인도네시아의 경우에는 오래 전부터 각 민족별로 다양한 젠더 표현이 있었다. 완두(wandhu, 자바어), 칼라라이(calalai, 나피에르어), 반찌(banci, 말레이어) 등 남자나 여자가 아니라 또 다른 성향을 가진 젠더를 지칭하는 단어가 존재한다는 것은 각 민족이 이미 성별을 두 가지로만 인식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부기족은 남성도 여성도 아닌 비수Bissu라는 존재가 신의 대리인 역할을 담당하며, 포노로고 지역에는 남성 무사인 와록warok과 남성 무희인 겜블라칸gemblakan의 결합, 자바에는 여성 커플인 센툴sentul과 칸틸kantil이 존재해 왔다.
이렇게 인도네시아에는 각 민족의 문화와 제도에 따른 성별 체계와 가족 제도가 구성되어 있었고, 그에 따른 고유의 질서와 갈등이 있어 왔다. 인도네시아는 민족적, 문화적 다양성이 높고, ‘게이gay’, ‘레즈비언lesbian’ 등의 서구의 개념을 생소하게 여겼을 뿐 젠더 다양성에도 친숙한 사회였다. 근대 인도네시아의 성소수자 운동은 1969년 자카르타에 최초의 와리아(Waria, 여장 남자 혹은 MTF 트랜스젠더를 의미함) 조직이 생기며 시작된다. 당시 와리아는 소수 집단이긴 하나 사회적 혐오나 무시의 대상이 아니었고 정부의 지원을 받는 데에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1980년대에는 게이와 레즈비언도 각자 다양한 단체를 설립하며 교류의 폭을 넓히고 성소수자 권리를 위해 활동했다.
인도네시아 성소수자 인권의 위기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복합적인 이유로 성소수자와 여성의 인권이 크게 위협받기 시작한다. 먼저 1988년에 인도네시아에 게이 에이즈 환자가 발생하면서 동성애에 큰 거부감이 없던 인도네시아 사회에도 ‘게이는 에이즈를 퍼트리는 집단’이라는 미국식 혐오 논리가 퍼지기 시작했다. 한편 수하르토의 오랜 독재가 끝나고 1998년에 등장한 하비비 정부는 민주화를 진행하는 동시에 민심을 잡기 위해 인도네시아 경제 위기의 책임을 국내 중국인에게 돌리는 혐오 정서를 조장한다. 이 중국인 혐오 전략에 편승한 남성들이 중국계 여성들을 강간 폭행하는 범죄가 늘어남에도 정부는 이를 철저히 외면한다. 그리고 2001년 9‧11테러 이후 미국 부시 정부가 강행한 강력한 반 이슬람 정책은 이슬람 종교 중 일부 극단적 근본주의가 결집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고, 이슬람이 지배적인 인도네시아에서도 특히 아체 지역에서 근본주의 세력이 과격하게 여성과 성소수자를 탄압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국내의 정치적 상황과 국제적 영향관계 속에서 여성과 성소수자에 대한 억압이 강화되었다. 특히 레즈비언 단체는 여성과 동성애자라는 이중적 차별로 인해 대외적인 활동을 하거나 다른 성소수자 집단과 연대하는 것을 매우 꺼렸다. 게다가 성소수자들이 서로 연대하기 위해 기구를 설립하고 대회를 개최하려 해도 급진적 무슬림 집단의 테러와 정부의 무책임한 방관이 그들을 위협했다. 그러나 이러한 탄압은 오히려 성소수자들이 단결하는 계기가 되어 2010년 전후로 인도네시아 전역의 성소수자 단체를 포괄하는 LGBTIQ 포럼과 인도네시아 각지에서 HIV/AIDS 문제에 대응하는 GWL 조직 등이 만들어졌다.
성소수자와 여성들의 연대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인도네시아에서 성소수자와 여성이 개인적으로는 가족에게 이성애 결혼을 강요당하고, 사회적으로는 종교 집단이나 보수적 남성에 의해 폭행을 당하고도 정부로부터 외면 받는 등의 억압을 공통적으로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페미니스트, 농업 노동자, 공장 노동자 등 다양한 위치에서 적극적으로 인권운동을 해오던 여성들이 당사자 또는 연대자로서 성소수자 인권 문제를 여러 ‘주류 민주화’ 운동과 유기적으로 결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여전히 인도네시아는 결혼 제도를 중심으로 한 억압이 계속되고 있다. 2026년부터 결혼하지 않은 상태의 성관계나 동거를 금지하는 법이 시행되어 여성과 성소수자의 삶은 한층 더 위협받고 있으며, 그만큼 반발과 저항도 커지는 한편 국제적 연대의 필요성도 절실해지고 있다. 현재 수비안토 정부의 무능과 보수화에 저항하여 전국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정치 개혁 및 노동자 생존권 시위와 더불어 성소수자 인권을 위한 싸움도역사적인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참고자료
장필화‧이명선 엮음(2015), 『우리들의 목소리 1』,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장필화‧이명선 엮음(2016), 『우리들의 목소리 2』,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최형미 기자, “차별 받고 고립된 성소수자… 강요된 이성애 문화 바꿔야”, 《여성신문》, 2016.
조고은: 페미니즘과 퀴어이론 서적을 꾸준히 번역해왔다. 현재는 번역행정사로도 일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