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니아 북클럽] 비자이 프라샤드 저, 박소현 역, 『갈색의 세계사: 새로 쓴 제3세계 인민의 역사』 서평: 제3세계가 3등 국가가 아니라 제3의 길이라는 의미였다면

[두니아 북클럽] 비자이 프라샤드 저, 박소현 역, 『갈색의 세계사: 새로 쓴 제3세계 인민의 역사』 서평: 제3세계가 3등 국가가 아니라 제3의 길이라는 의미였다면

조고은 (번역가, 번역행정사)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은 나의 과거를 아는 것이다. 그렇기에 여러 작품에서 기억상실은 자아의 상실로 다뤄지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갈색의 세계사』는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역사를 통해 제3세계가 무엇인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무엇이 되고자 했었는지’를 밝혀보는 책이다. 먼저 저자 비자이 프라샤드는 제3세계란 단순히 어느 지역이나 국가가 아니라 ‘프로젝트’였다고 강조한다.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국가들이 각자 뚜렷한 문제의식과 지향점을 가지고 새 나라를 건설하려던 프로젝트. 프라샤드는 그 지향과 실천을 제3세계 프로젝트를 주도하던 지배자는 물론 그에 따르거나 맞서던 여러 사회계급의 삶과 노동에 초점을 맞추어 정리한다.

이 책에서 194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제3세계의 인민들은 새로운 민족국가를 건설하여 대안적 세계 지형을 만들고자 한다.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던 무렵 세계는 유럽과 미국(제1세계)의 자본주의와 소련(제2세계)의 사회주의가 대립하던 냉전시기였다. 그러나 이제 막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난 국가들은 둘 중 어느 곳에 편입되기보다 파탄난 제국주의의 대안이 될 정의의 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스스로 정치적 연대를 구축한다. “제3세계”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프랑스의 비판적 지식인 알베르 소비는, 프랑스 혁명에서 제3신분인 부르주아가 새로운 국민주권을 만들어냈듯, 인도 독립운동을 비롯하여 과거 식민지국가들이 이끄는 저항적 정치 운동이 대안적 국제질서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 명칭에 대한 당사자들의 반응은 그저 그랬지만, 인도, 인도네시아, 멕시코, 가나 등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아메리카의 각 나라들은 이름 때문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하나가 되어갔다. 제국주의적 유산과 그 지속에 반대하는 반식민 운동을 벌이고 서로 연대하면서 사회적 정당성을 쟁취하면서 공통의 정체성을 가진 ‘정치세력’이 된 것이다.

제3세계 프로젝트의 당면 과제

이들의 여정은 탐색-함정-암살의 3부로 다뤄진다. 1부 탐색은 1960년대 초까지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제3세계가 독자적 국가체계를 구축해가는 과정이다. 유럽을 위한 부속국이었던 나라를 독립국가로서 다시 세우려면 무엇부터 해야 할까? 내게 인상 깊었던 것은 세 가지 과제이다. 냉전의 체제 경쟁에 휩쓸리지 않고 국제 지형 속에서 자주적 입지를 마련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광대한 영토와 인구에도 불구하고 저부가가치의 1차 산업만을 남겨 둔 식민주의 경제체제를 어떻게 개선해야 할까? 서구 문화가 더 우월하고 진보적이라는 계몽주의적 가치관 속에서 독립국가의 정신적 기반이 되어줄 민족문화는 어떻게 발전시켜야 할까?

첫 질문에 대한 답은 1955년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나왔다. 아시아아프리카 회의에 모인 29개 신생국 대표들은 군비경쟁과 약탈적 자본의 침투를 거부하고, 평화주의와 경제협력이라는 제3 세계의 독자적 지향을 공표했다. 나아가 제국주의 국가가 쏟아부었던 문화적, 인종적 모욕에 반발하여 문화협력을 주창하며 강력한 감정적 연대를 형성했다. 경제에 대해서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이루어진 모색이 소개된다. 보호관세로 국내 산업을 보호하고, 제3세계 무역기구를 만들어 수출할 1차 산업 상품의 가격을 통제하자는 것이다. 즉, 제3세계가 단결하여 제국주의적 착취에 대항할 수 있는 무역구조를 만들어 경제성장을 이루고자 했다. 그리고 문화에 대한 고민은 이란 테헤란의 지식인의 경우를 소개한다. 이들은 문화제국주의를 탈피하되 민족 고유문화라며 중세로 회귀하지도 않는 길을 찾았다. 다양성과 차이를 인정하는 다민족주의, 자치적 공동체를 육성하는 민주주의, 문맹퇴치와 과학기술 교육을 장려하는 합리주의가 그것이다.

여기서 나는 내가 번역한 실라 미요시 야거의 『애국의 계보학』을 떠올렸다. 그 책도 해방 전후 건국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수행할 때 한국의 지도자들이 어떤 서사와 이미지를 지향했는지를 분석한다. 야거는 젠더성을 주된 분석틀로 삼아, 가령 박정희의 경우에는 조선시대 양반의 나약하고 관념적인 남성성과 백성(농민)의 게으르고 무능한 남성성을 한국의 고질적 문제로 내세웠다고 분석한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할 지도자로서 본인을 유능하고도 진취적인 무신인 이순신에 대입하며 한국을 박정희-이순신을 모델로 하는 국가로 개조하는 기획(새마을운동 등)을 추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아버지를 자처하던 이념 정책과 달리 박정희 정부는 국민의 정치적, 경제적 권리를 보장하지 않았다.

제3세계 프로젝트의 정치적‧경제적 위기

『갈색의 세계사』의 2부 함정에서도 이처럼 익숙한 내적 모순의 전개가 우울하게 펼쳐진다. 노동자와 농민의 지원으로 국가의 독립과 발전을 도모하던 제3세계 국가의 지배계급은 자국 인민의 정치적, 경제적 필요를 묵살한 채 관료주의와 권위주의로 치달았다. 이에 저항하는 인민들의 요구는 억압당했고, 결국 군사쿠데타와 군부지배로 이어졌다. 70년대 이후 좌파가 몰락하고 보수계급이 득세하며 인도네시아와 인도를 비롯한 제3세계 여러 국가는 종교, 인종주의, 위계에 의존하는 보수적 민족주의에 빠졌고, 중국과 인도는 영토분쟁을 계기로 국수주의가 심화되었다.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와 중동의 여러 국가들은 제1세계의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자원과 노동력에 대한 주권을 넘겨주게 된다.

1980년대 이후를 다룬 3부 암살에서는 ‘IMF식 세계화’라고 지칭되는 초국적 금융자본이 본격적으로 제3세계의 경제에 침투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자급경제와 민주주의를 통해 새로운 독립국가를 건설하자는 목표를 폐기하고 지주와 자본가의 이득을 추구하기로 한 제3세계의 보수계급이 영합하면서, 제3세계의 경제는 다시 제1세계에 종속되고 인민들의 삶은 피폐해진다. 1970년대 석유 파동을 계기로 경제 위기를 겪은 페루, 자메이카, 수단 등 여러 국가는 IMF 구조조정기금을 대가로 국가의 경제구조를 완전히 저임금, 저규제, 민영화로 개조하여 초국적기업이 제3세계의 생산물을 아무런 보호장치 없이 헐값에 가져가는 착취구도로 되돌려놓는다.

1부에서 ‘제3세계’가 그저 구식민지국가를 억지로 묶어서 부르는 차별적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 공통의 정치적 의제를 가지고 활발히 협력하던 하나의 정치적 연대체였음을 알 수 있었다면, 2부와 3부에서는 새 나라를 건설하는 프로젝트를 수행한다고 해서 그 국가가 하나의 이해 관계를 가진 집단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이는 한국이 걸어온 길이기도 하기에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국가’의 경제를 발전시킨다는 박정희의 경제정책은 남성노동자의 저임금과 그보다 더 낮은 여성노동자의 저임금 및 무임금 가사노동, 그리고 저임금을 뒷받침하기 위한 농민 대상 저곡가 정책을 바탕으로 이루어졌고, 민중들의 저항은 군부의 독재와 학살로 탄압되었으며 그나마 약간의 성과를 나눠가졌던 중산층마저 IMF 구조조정을 계기로 몰락했다. 그리고 그 모든 성장의 과실은 전국의 국민보다는 제1세계의 자본과 동질감을 가지는 소수의 지배계급에게 돌아갔다.

도망칠 수 없는 현재를 비춰주는 과거

이 책의 번역가 박소현은 『갈색의 세계사』가 내적 모순과 외적 압력에 의해 새로운 사회의 꿈이 무너져내리는 과정이기도 하다고 지적한다. 나 역시 2부 중반부터는 이 슬픈 이야기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에 불쑥불쑥 사로잡혔다. 그러나 사회라는 영속적 개체를 대상으로 하는 역사라는 이야기에 고유한 특징이 있다면, 과거에 어떤 실패가 있어도 바로 그 실패의 자리에서 현재의 무수한 사람들이 여전히 삶을 지속한다는 점일 것이다. 세계대전이 일어나든, 핵발전소가 폭발하든, 전염병이 돌든, 실패한 부분을 깨끗하게 싹 밀어버리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없다. 모든 흔적이 고스란히 쌓인 폐허 위에서 모든 문제를 몸에 새긴 채, 사람들은 계속 삶을 이어가야 하고 어떻게든 사회를 복구할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제껏 실패의 여정을 목격한 후에도 여전히 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이란, 쿠바 등 이 책에 등장한 모든 곳에서 지금 이 순간 인민들이 정치, 경제적 권리나 평화를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이 땅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조건은 어떻게든 현실을 직시하고 희망을 찾아내기를 강제한다. 그리고 현재의 나, 그리고 내 곁의 제3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자가 이 책의 목표로서 강조했던 것처럼 그들의 과거,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고 함께 상상하며 도전했던 시간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7월 28일부터 하반기 두니아 북클럽이 시작됩니다.

아시아의 다양한 모습을 다루는 책을 읽고 다양한 계기로 아시아에 관심을 가지게 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흥미진진한 자리에 참여해보세요!


조고은: 페미니즘과 퀴어이론 서적을 꾸준히 번역해왔다. 현재는 번역행정사로도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