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니아 북클럽] 진 테일러 저, 여운경 역, 『인도네시아: 사람들과 역사들』 서평: 우리는 모두 인도네시아 역사를 읽어야 합니다

[두니아 북클럽] 진 테일러 저, 여운경 역, 『인도네시아: 사람들과 역사들』 서평: 우리는 모두 인도네시아 역사를 읽어야 합니다

조고은 (번역가, 번역행정사)

진 테일러의 『인도네시아: 사람들과 역사들』은 기원전 2천 년경 보르네오, 자바, 수마트라 섬에 인간의 공동체가 생겨나기 시작한 무렵부터 20세기 후반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수카르노와 수하르토 정권이 들어서는 시기까지 인도네시아의 역사를 정리한 500여 페이지의 두툼한 역사책이다. 독서모임이 있었던 4월 28일에 이 책을 번역한 서울대학교 아시아언어문명학부의 여운경 교수님이 책에 대한 개괄적 강의와 질의응답을 함께해 주신 덕분에 비교적 수월하게 책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간 접할 일이 흔치 않았던 인도네시아 역사를 아무런 직업적 강제 없이 고대부터 현대까지 총망라한 벽돌책으로 읽어야 한다고 하면, 책장을 열기 전에 우선 이런 질문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내가 꼭 인도네시아 역사를 이렇게까지 읽어야 할까? 나는 스스로를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역사는 인문학 중에서도 유독 유용한 학문이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역사를 집필하기 때문이다. 비단 수시로 뉴스를 장식하는 참사, 전쟁, 계엄 등 거대한 사건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엄마는 나와 오빠를 각각 어떻게 키웠나’, ‘나는 어쩌다 5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나’, ‘프로게이머 페이커가 소속된 게임단 T1은 어떻게 LCK 10회 우승과 월드 챔피언십 3년 연속 우승을 달성했나’ 등등에 대해 각자의 방식으로 과정을 서술하고 가치를 평가한다. 이때 우리는 가장 정당한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바를 택하여 더 좋은 역사를 쓰고자 한다. 그것은 엄마가 그런 적 없다고 잡아떼는 사건들을 집요하게 발굴하여 입증하는 방식이기도 하고, 사회 전체의 정치경제적 흐름과 특정 회사 집단의 미시적 권력관계가 우연적・필연적으로 교차하는 역동을 인식하는 방식이기도 하며, 걸출한 영웅과 그가 이룬 위대한 사건을 중심으로 왕조와 주변국의 흥망성쇠를 노래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렇게 필요나 취향에 따라 자기 나름의 역사를 집필할 수 있는 이유는 지금껏 다양한 계기로 여러 형태의 역사를 접해왔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같은 대상에 대한 역사가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유명한 역사적 사건을 소외되었던 인물의 관점으로 재구성한 영화나 주류 역사가 은폐해 왔던 새로운 진실을 폭로하여 역사를 다시 쓰는 TV 프로그램, 현재와 과거를 타임워프하며 과거의 유산이 현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탐구하는 SF 소설을 보며 내가 알던 역사가 입체적으로 풍부해지는 것 자체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 테일러의 인도네시아 역사는 지금껏 접해보지 못한 아주 새로운 역사를 소개한다. 한국에서 역사를 배운 사람들에게 역사는 ‘태정태세문단세’, 혹은 고조선-삼국시대-통일신라-고려-조선-일제강점기로 시작한다. 즉 역사란 정해진 영토 안을 채운 왕조와 백성이 국가를 세우고 국경 밖에 존재하는 외세에 맞서 나라를 지키고 번영시키는 것이다. 경계 안에서 왕조는 백성을 통제하고 백성은 왕조에게 생존의 보장을 요구하며 밖에서 외세는 무력으로 국경을 침략하거나 압도적인 문명을 내세워 독립된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위협한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역사는 처음부터 전혀 다르다. 태평양과 인도양이 교차하는 바다에 여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인도네시아 군도는 바다 생활을 중심으로 자주 거주지를 옮기며 다양한 집단이 자연스럽게 섞이고, 인도, 중국, 중동, 유럽 등 다양한 나라들이 빈번하게 교류하며 영향을 주고받으며 역사를 만들어갔다. 가령 기원전 큰 인도네시아 우림의 대규모 공동체가 숲에서 채집한 송진, 나무껍질 등을 접착제, 향료, 약재 등으로 활용하며 문명을 발달시킬수록 분리된 독립국가가 확립되는 것이 아니라, 그 문명에 매료되어 찾아온 인도와 중국과의 교류가 더욱 활발해지며 한층 문화가 뒤섞이고 경계가 움직이는 쪽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물론 군도에도 부와 권력을 가진 지배자가 있었지만, 그들 역시 뱃사람-상인들을 통해 외국 전문가를 충분히 활용하여 인도나 중국의 지식과 종교, 국가 제도 등을 능동적으로 흡수했다.

5세기 전후로 군도의 각지에 여러 왕국이 건설된 후에도 마찬가지이다. 지배자들은 자신의 나라를 건설하고도 여전히 상인, 모험가 등 움직이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해상 문명을 발전시킬 외국의 문물에 관심이 많았고, 10세기 이후부터 선박 제작부터, 항해, 무역까지 해양업 전반에 뛰어난 이슬람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무슬림 해양 네트워크로 활동 범위를 확장한다. 이렇게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 등 여러 국가의 문화가 교차하며 번성하던 인도네시아 군도는 16세기에 후추, 육두구 등 인도네시아의 귀한 자원을 목표로 한 기독교 포르투갈인들이 진입하고, 군도의 지배자들도 자신의 권력을 더욱 강화할 방법을 이슬람, 중국, 포르투갈 등 외부 전문가를 통해 찾기 시작하며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띤다.

이렇게 다양성과 이동성이 두드러지는 인도네시아의 역사는, 대중, 물질문화, 일상 등 사회문화적 흐름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한 테일러의 자율사관에 의해 한층 더 역동적으로 구성된다. 테일러가 서술하는 역사의 등장인물은 지배자, 백성, 타국의 상인과 종교인에 그치지 않는다. 계절에 따라 바뀌는 바람의 방향이 상인들의 동선과 그들이 머무는 인도네시아 마을을 어떻게 바뀌어놓는지, 인도네시아에서 나는 후추는 지역의 산업과 여성들의 삶을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각 지역의 비석에 새겨진 다양한 언어 표기체계에는 타 지역과의 교류, 전문 저술가들의 견문, 금속세공사들의 기술의 역사가 어떻게 집결되어 있는지 등등, 인도네시아의 지리, 식생, 농작물, 문화요소들이 역사를 만드는 어엿한 역군으로서 다채롭게 등장한다. 이 등장인물들은 본문 속에 등장하기도 하지만, 박스 처리되어 중간 중간 삽입되기도 하는데, 이는 여러 개의 중심이 모였다 흩어지고(다중심적) 여러 인물들의 목소리가 중첩되어 들리는(다성적) 테일러 역사의 특성을 아주 잘 드러내는 독특한 편집 방식이라 또한 절묘한 맛이 있다. 시간이나 인과에 따라 흘러가는 본문 속에 사물이나 사건의 짧은 에피소드를 담은 박스가 드문드문 박혀있는 구성을 통해 자바 섬, 혹은 인도네시아 원주민만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의 일대기가 아니라 여러 지역과 사물들, ‘사람들’이 뒤얽혀 만드는 ‘역사들’을 직조하고자 했던 테일러의 기획을 형식적,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인도네시아 역사를 읽어야 합니다”라는 이 글의 제목은 명백하게도 나이지리아 출신 페미니스트 소설가인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를 인용한 것이다. 아디치에는 남자든 여자든 오늘날 젠더질서에는 문제가 있음을 인식해야 성역할에 고착되지 않은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도네시아: 사람들 과 역사들』은 자율사관이라는 진 테일러의 관점과, 대양과 대륙이 교차하며 무수한 국적과 문명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가는 유동적 사회조건, 다양한 종교와 언어, 사람들과 오랫동안 만나고 적응하며 살아온 사람들의 축적된 역량을 통해 국경을 기초로 하는 역사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또 한 번 자유를 선사한다.


조고은: 페미니즘과 퀴어이론 서적을 꾸준히 번역해왔다. 현재는 번역행정사로도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