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의 홍수: 시스템 실패가 남긴 핫야이의 침몰한 진실
태국 남부를 덮친 대규모 홍수, 특히 말레이시아 국경과 맞닿은 태국 최대 상업도시 핫야이(Hat Yai)를 집어삼킨 이번 수해는 단순히 도시 인프라와 산업 시설을 물에 잠기게 한 사건이 아니었다. 이 재난은 도시 배수 요충지, 행정 시스템, 그리고 시민 공동체 전반의 신뢰를 동시다발로 붕괴시키며, 태국의 재난 거버넌스가 안고 있는 오랜 구조적 기능 부전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핫야이는 태국 남부 경제·교통의 심장으로 여겨졌다. 물류와 상업, 교통의 핵심 관문 역할을 해온 이 도시는 이번 재난을 통해, 수십 년간 반복해온 전문가들의 경고가 현지 정치 및 행정 리더십의 무대응 속에서 방치되었음을 확인했다. 기록적인 폭우는 분명 재난의 촉발점이었지만, 실제로 핫야이를 물속으로 가라앉힌 건 정치 리더십 부재, 장기 재난 대비 계획 결핍, 그리고 치명적인 소통 실패였다.
도시가 잠식한 배수로, 무시당한 전문가 경고
전문가들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도시의 무분별한 확장 과정에서 핫야이의 주요 배수로 역할을 해온 ‘우타파오(U-Tapao) 운하’가 인재에 가까운 도시 설계 실패로 인해 점차 방어 능력을 잃고 있다고 강조해왔다. 특히 운하 주변에까지 상업·주거 지구가 확장되면서 수로의 구조적 안정성은 크게 훼손되었고, 이에 따라 관련 재난 대비 시스템 회복력이 크게 저하되었다.
그러나 현지 재난 장비와 대비 수준은 충격적이었다. 홍수 이후 시장 나롱폰 나 팟탈룽(Narongporn Na Phatthalung)은 “취임 4개월밖에 되지 않았다”면서, “핫야이는 고작 5척도 안 되는 오래된 보트만 보유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태국 시민 다린 니차(Darin Nicha)는 예산이 충분한 상업 관문 도시 핫야이가 이런 장비 수준이라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선거철에는 각종 정치 발언과 움직임이 난무하면서 정작 대비는 전무했다고 지적했다.
녹색 깃발이 보낸 허위 안전 신호와 붕괴된 신뢰
이번 수해에서 가장 치명적인 건 3미터 이상 치솟은 물 덩어리 앞에서도 ‘안전하다’는 잘못된 행정 소통 체계로 믿음을 줘, 시민을 안심시키는 바람에 대응 시점 자체를 늦춰버린 소통 실패다.
핫야이 시는 홍수 경보 깃발 색상 시스템에 줄곧 의지해왔다. 그러나 이번엔 그 경보 자체가 오작동했다.
“과거엔 홍수가 다가오면 깃발을 직접 보러 가곤 했다. 그런데 물 덩어리가 도시를 덮친 그 순간까지도, 깃발은 녹색(안전) 상태였다.”
안전 신호 오작동은 곧이어 시장 본인의 ‘통제 중’이라는 발언으로 강화되었다. 시장은 홍수가 올 때까지도 “모든 상황은 안전하다”는 메시지를 유지했다. 그러나 그 몇 시간 사이 물 높이는 3미터 이상 치솟았고, 도시 지하철과 도로, 병원은 물속에 잠겼다.
한 피해자는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짐을 옮기지 않은 이유는 홍수가 아니라 시가 '괜찮다, 상황은 통제 중'이라고 말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도 그 말을 믿고 짐에 손도 못 댔다. 믿었기 때문에 모든 걸 잃었다.”
이번 수해는 기반뿐 아니라 행정에 대한 신뢰를 함께 침몰시킨 사건으로 기록됐다.
중앙정부의 뒤늦은 '총리 책임 인정'
홍수 이후, 태국 총리 아누틴 찬비라쿨(Anutin Charnvirakul)은 이례적으로 국가 리더십 실패를 인정했다.
“정부는 재난 대응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건 재해만이 아니라 인재에 가까운 행정 설계 붕괴다. 모두 총리인 내 책임이다.”
사과는 있었지만 구호 작업은 느렸다. 시민들은 9,000THB(약 42만 원)의 긴급 가구 구호 패키지를 받기 위해 시청에 몰려들었고, 주민들이 집 진흙을 씻어내기 위해 깨끗한 물 2,500리터를 1,500THB(약 7만 원)에 직접 구매해야 했다. 한 주민은 이렇게 말했다.
“선거운동할 때처럼 집까지 찾아와 주길 바라는 건 아니다. 하지만 선거철엔 어떻게든 우리 집에도 오지 않았나. 이런 때는 왜 안 오나.”
침수 지역 병원의 폐업 선언
도시는 해마다 홍수와 함께했지만, 복구를 포기하거나 영구 폐업을 선언한 병의원도 있었다. 18년간 산부인과 클리닉을 운영한 한 의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핫야이에서 18년간 진료했다. 그러나 백만 바트(약 4,627만원)가 넘는 초음파 장비가 모두 사라졌다. 폐업 이외의 선택이 없다.”
또 한 노년의 식당 주인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와 새로 시작하기엔 너무 늙었다.”
사과를 넘어선 구조 재설계 필요성
핫야이 재난은 발생 직전까지 단기 '상황 통제론'으로 가려져온 장기 재난 설계 실패, 즉 국가 리더십 및 도시 배수 계획 실패 사례다. 이제 필요한 건 정치적 수사나 단기 사과가 아닌 전문가 중심의 독립 진상조사와 구조 개혁이다.
물이 빠지면 도시는 언젠가 복구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시민들이 그간 믿어온 재난 관리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수위 3미터의 홍수보다 더 높이 올리지 않으면, 신뢰 복구는 불가능할 것이다. 정치의 물 수위가 아닌 진실의 물 수위로—시민의 눈 앞에서 책임 조직이 다시 작동하기 위해선, '책임의 홍수'가 계속 높아져야만 한다.
취재: Veena Thoopkrajae veenxpress@gmail.com (태국 영자일간 <The Nation> 전 편집기자)
번역: 이슬기 skidolma@thedun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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