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니아 북클럽] 이정우, 『인터뷰로 만나는 태국 민주주의』 서평: 국회의원 선거를 마친 태국 청년들과 지방선거를 마친 한국 중년의 교감이란
글 조고은 (번역가, 번역행정사)
지금 이 순간 태국에서 민주주의를 바라는 국민들과 이제 막 지방선거를 마친 나는 비슷한 의문에 사로잡혀 있다. 시위와 투표를 통해 민주주의는 얼마나 성장할 수 있는가. 그 성장이 아주 더디다면 나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는가.
태국 정치 연구자인 이정우가 2024년 10월부터 12월까지 직접 태국 시민들을 만나본 내용을 담은 『인터뷰로 만나는 태국 민주주의』는 지금 현재 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고 있는 젊은이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어볼 수 있는 책이다. 특히 각 인터뷰 전후로 이정우 연구자가 서로를 어떻게 알게 되었고 어디서 만나기로 했으며 가는 길의 마음가짐은 어땠는지 등 만남의 구체적인 맥락과 인터뷰를 마친 후의 소회를 진솔한 어조로 적어주어 태국 청년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더욱 가깝게 공감하며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나의 고민과 비슷하기도 했고 의외롭고 신선하기도 했다. 2019년부터 2024년까지 태국 시민들이 접한 문제는 시위와 투표를 통해 왕정의 독재를 견제할 만한 진보적 정당을 선출해도 번번이 그 시도가 왕정과 군부의 독단에 의해 무산되어버린다는 점이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태국은 왕정국가로, 강력한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는 왕실이 군부와 결탁하여 쿠데타를 통해 왕정을 비판하는 정치세력을 제압하며 권력을 유지해왔다. 또한 ‘왕정모독죄’라는 엄격한 법으로 국민들의 자유로운 정치활동을 억압했다. 태국 국민들은 굴하지 않고 꾸준히 시위에 나서며 왕정에 저항하는 정치인과 군부와 헌법을 바꾸고자 하는 개혁정당을 지지했다. 하지만 2006년과 2014년의 쿠데타, 2020년의 정당해산으로 정치 변화를 향한 태국 국민들의 열망은 수차례 좌절되었고, 해산 후에 다시 만들어지는 정당은 젊은 시민들의 변혁 의지에 비해 타협적인 성향으로 바뀌어갔다.
그리고 2023년에 있었던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들, 특히 청년층은 다시 한 번 왕실 개혁과 왕실모독죄 개정을 전면에 내세운 까우끌라이당(영문명 Move Forward Party)을 열렬히 지지하며 가장 의석이 많은 제1당으로 만들어내었지만, 이 당 역시 군부의 개입으로 인해 2024년에 해산되고 만다. 그런데 이런 부당한 처사에 분노한 시민들이 곧바로 태국 전역에서 시위를 벌였던 2020년과 달리 2024년에는 시위가 일어나지 않았고, 저자는 이 변화에 매우 깊은 궁금증을 가지게 된다.
민주주의의 적은 좌절과 고립
우리가 현실에 발 딛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생활인인 한, 희망 역시 상상보다는 현실을 근거로 만들어진다. 시민들의 민주화 열망이 거듭 무산되는 절망적 현실 앞에서 희망의 근거를 찾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국가의 탄압이 엄혹해지며 2022년부터 이미 시위는 줄어들기 시작했고, 시위의 중심 인사들은 구금되거나 해외로 망명했다. 시위에 나가서 같은 열망을 공유하는 진짜 친구들을 만났다는 20대의 청년은 시위 참여가 너무 위험해서 주변사람들에게 같이 가자고 권하기는 어렵다고 털어놓았다. 태국 정치 지형에 대한 자기만의 입장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하던 10대 청년도 또래 친구 대신 인터뷰로 만난 이정우 연구자에게 연애 상담을 해 왔다. 이제 다들 의지가 꺾였고 더 이상 정치 얘기를 꺼낼 수 없다고 느낄수록 고립 또한 엄연한 현실이 된다. 이런 태국 청년들의 혼란과 두려움을 만나고 돌아설 때마다 저자 역시 울음을 터트리거나 배회하거나 연구의 방향을 곱씹으며 고민을 함께한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진상을 알기 위해 무능한 대통령을 탄핵한 후에도 끝내 참사의 책임은 밝혀진 바가 없던 이후로, 꾸준히 문제가 터질 때마다 시위와 투표에 참여했지만 내가 과연 이 국가 제도를,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믿을 수 있는지 회의만 커졌던 내게도 이런 좌절과 고립은 익숙한 것이었다.
좌절과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는 현실의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하지만 태국 청년들은 여전히 변화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있었으며, 스스로를 그런 변화를 만들어낼 역량이 있는 주체라고 평가한다. 이것이 내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신선했던 부분이다. “젊은 세대를 정의한다면?”이라는 질문에 인터뷰 대상자들은 입을 모아 ‘용기’, ‘부당한 일을 참지 않는 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능동적으로 추구하는 자세’ 등으로 답했다. 젊은 세대는 나약하고 정치에 무관심하다고 평가하는 한국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또한 그들은 태국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 매우 엄혹해졌음을 분명히 인식하면서도 IT 기술 등 젊은 세대가 활용할 수 있는 새로운 수단을 통해 돌파구를 찾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자신과 국가의 미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청년들은 오랜 투쟁에도 불구하고 제자리걸음인 듯한 현 사회를 굳이 기성세대의 책임으로 돌리며 그들을 냉소하지도 않는다. 기성세대를 여전히 함께 정치에 참여하고 있는 동료로 여기며 그들의 공과 과를 모두 이해하려고 했다.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인터뷰에 임한 젊은이들이 저자와 대화하는 경험 자체로 더욱 힘을 얻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가까이 있는 친구들과 정치에 대해 터놓고 말하기 어려워진 상황에서, 그들은 해외에서 자신의 의견을 경청하기 위해 찾아온 정치 연구자와 고민을 공유하며 아픔을 되새기기도 하지만 활기를 되찾는 것 같기도 했다. 이는 그들이 SNS를 정치적으로 매우 유용한 도구로 평가하는 이유와도 연결된다. 왕정모독죄로 표현의 자유가 아무리 제약되어도, 태국의 청년들은 SNS를 통해 다른 나라의 정치 상황을 알 수 있었고, 동세대의 활동에서 영감을 얻거나 자신들의 활동에 대한 지지를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청년들이 자신들의 활동을 공부하러 온 이웃나라 연구자를 만나 ‘죽기 전에 태국이 완전한 민주주의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완전하지는 않겠지만 더 나은 민주주의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으며 이를 위해 시위의 리더가 되고 싶다, 현실 정치에 참여하고 싶다, 정치학을 연구하고 싶다고 대답한다. 이러한 대화는 몸으로 직접 연대를 경험하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대화를 담은 이 책을 통해 한국에 사는 나 또한 ‘방법은 점점 더 많아지고 있으니 여전히 한 번 더 싸워보고 싶다’고 기운차게 말하는 태국의 젊은이들을 만난다. 이렇게 비슷한 갈등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를 발견할 때 연대는 현실이 되고 이를 근거로 희망을 찾아갈 수 있다.
지방선거를 마친 이후로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판단은 더욱 혼란스럽기만 하다. 후보들의 정책은 무능한 동시에 차별적이었고 국가 제도와 기관의 운영은 방만했으며, 시민들의 반응은 분열적이다. 한국 사회는 대체 어느 정도 민주화되었고 어느 정도 극우화된 거지? 시민들끼리 서로 소통은 가능한 상태인가? 서로를 이해하거나 분석하려다 안 되면 그냥 보고 싶은 대로 보면서 각자 고립되는 것인가? 이렇게 사회와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고 절망에 빠지려는 찰나에 만난 태국 청년들의 이야기는 더욱 고무적일 수밖에 없다. 그들이 어둠 속에서도 새로운 수단을 찾아내고 동료를 발견하며 희망과 용기의 근거를 찾아내는 방법을 지금 꼭 한 번 되새겨보려 한다.
조고은: 페미니즘과 퀴어이론 서적을 꾸준히 번역해왔다. 현재는 번역행정사로도 일하고 있다.
